한국등산학교

한국등산학교

프롤로그

1974년 한국최초의 등산학교로 설립된 한국등산학교는 성실, 인내, 안전이라는 교훈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등산교육의 역사와 함께 태동한 교육기관 입니다.(2004년 기준) 


한국등산학교는 개교이래 30 년간 유수의 전문산악인을 비롯 약 8천 여명의 동문들을 배출시키며 경찰특공대, 경찰산악구조대, 국립 공원 관리공단, 중앙소방학교 등을 대상으로 체계적 이고 전문적인 인명구조 및 산악교육을 담당해 왔습니다. 한국등산학교가 설립되게 된 배경으로는 6 0년대말부터 7 0년대초의 각종 등반사고 및 조난사고로 인해 산악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면서 곧 등산이 의욕만으로는 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다양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체험하는등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부터입니다. 


1969년 2월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일어난 조난 사고(눈사태로 10명 사망)는 히말라야 등반을 목표로 한 한국산악회의 훈련대가 훈련중에 일어난 조난 사고였으며, 이 사건으로 일제 때 도입된 전근대적인 적설기 등산기술이 전승되어 온 당시의 기술수준 으로는 히말라야 같은 고산등반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의 교육사진, 당시의 복장과 장비들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1971년 11월, 인수봉에서 대형조난(11월 28일, 7명 사망, 16명 부상)과 히말라야 마나슬루에서 1971년에 이어 1972년의 대형조난사고(눈사태로 1 5명 사망)로 일반인 뿐 만 아니라 전문가들을 위한 등산교육의 필요성도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1970년대 경제개발계획으로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자 전세버스 나 고속버스를 이용, 더욱 먼 산으로 등산을 다녀올 수 있게 되어 산행 대상지가 넓어지고 따라서 등산인구도 늘어났으나 늘어나는 등산인구만큼 산에서의 무질서 등으로 인한 그 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앞서 언급한 대로 조난사고가 증가하기 시작했으나 이를 예방할 관계기관의 대책도 전무했습니다. 


이를 책임져야 할 산악계 조차 이런 시대 변화와는 무관하게 보수적인 체제를 유지하고 있어 급변하는 사회변화를 수용할 능력이 전무했기에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상설 등산학교의 필요성이 산악계 소장파 인사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거론되기 시작 했으며 이런 소장파 인사들을 중심으로 당시의 폐쇄 적인 산악계의 체제를 혁파하고 나온 것이 바로 '한국등산학교'의 설립이었습니다.   본교가 개교할 즈음인 1970년대 해외 산악계는 히말라야에서 8,000미터 봉우리의 벽등반 시대가 이미 도래하여 안나푸르나 남벽과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 포위전법의 등반방식이 정점에 다달아 있었으며 동시에 8,000미터 봉우리에서 최초의 알파인스타일 등반을 성취시켜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연 때였습니다. 알프스에서는 최난 루트의 동계 단독등반이, 미국의 요세미티에서는 거벽의 자유등반이 시험되고 있을 즈음, 국내에서는 일부 선각자들에 의해 겨우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상설 등산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부언 하자면 세계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프랑스 국립등산스키학교( E N S A )는 1937년 개교 하였으며 이웃 일본의 문부성(우리의 교육부 해당)산하 등산 연구소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개소 하였습니다. 


이런 나라에서는 일찍이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 하여 히말라야에 원정대를 파견하는 국가치고 국립 등산학교 내지는 그에 준하는 대표적인 등산학교가 없는 나라가 드문 데 비해 이를 갖추지 못한 나라는 우리나라 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렇듯 국립등산학교의 존재는 그 나라의 문화척도에 영향을 줄만큼 중요한 것인데도 아직까지 국립 등산학교가 설립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을 통감, 뜻있는 산악인들에 의해 사설 등산학교가 설립 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적, 역사적 사명감을 바탕으로 어렵게 태동된 한국등산학교는 투철한 살신성인의 사명감을 가진 선배 산악인들이 없었다면 존재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정신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성실, 인내, 안전이라는 교훈 아래 지금도 단단 하게 새로운 역사와 함께 강인한 산악인들을 배출하고 있습니다.


 
학교장 인사말 


저희 한국등산학교는 개교 34년이 되는 올해 69기 정규반 교육을 무사히 마침으로써 지금까지 총 200여회의 교육을 통해 9천여명의 수료생들을 배출하였습니다. 저는 이러한 성과가 한국 산악계의 발전에 미약하나마 한 몫을 담당했다고 자부하며 그 기쁨을 산악인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일찍이 체계적인 등산교육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1974년에 출범한 저희 한국 등산학교가 오늘에 이르기까지에는 많은 분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습니다. 이런 성과는 그 동안 성실, 인내, 안전이라는 교훈아래 묵묵히 수고해 주신 많은 강사님들과 학교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등산학교 후원회 위원 여러분, 그리고 저희 학교를 도와주신 등산장비 제조업체 관계자 여러분들의 든든한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세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한국은 앞서가는 인터넷 강국이 되었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많은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실제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정보화 사회라는 인식을 재삼 다짐하면서 개교 30주년을 맞아 저희 한국등산학교에서는 그 동안 운영해 오던 홈페이지를 새롭게 개편해 여러분들에게 다가가고자 합니다. 사용자 위주로 이번에 새롭게 개편된 홈페이지가 9천여 동문들을 하나로 묶는 유용한 네트워크가 됨은 물론 산악인 여러분들과 유익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잇는 유익한 사이트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마지 않습니다. 


새로 개편된 홈페이지가 전통에 집착하기 보다는 변화를 주도할 줄 아는 산악인의 장이 되고, 지나간 30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장이 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학교교훈



성실 인내 안전의 세가지 교훈은 권효섭 교장이 개교당시 직접 지은 것으로 등산학교 교육의 특수성을 충분히 감안했다고 할 수 있다. 

성실은 등산학교의 교육기간 뿐만 아니라 수료 후 에도 성실한 자세로 등산에 임하면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하고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데에 그 근본정신을 두고 있다. 

인내는 등산학교의 힘든 교육과정은 인내하지 않으면 극복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등산이라는 스포츠가 가진 인내하는 자만이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뜻에서 지어졌다. 

안전은 등산자체가 지니고 있는 위험성 때문에 교육시는 물론, 수료 후에도 늘 유의해야 할 점으로 기본 수칙이다. 


이러한 세 가지 뜻의 교훈을 철저히 지켜 산에 오른다면 어떠한 어렵고 힘든 산이라도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성실하고 인내하는 사람으로 사회생활을 한다면 더욱 밝은 사회를 창조하는데 일익을 담당한다는 설립시의 교육이념을 뜻하고 있다. 


● 학교휘장



본교를 상징하는 휘장은 전체가 타원형으로 가장 자리가 황금색 줄로 둘러져 있는데 이는 유럽에서 십자군 전쟁시 전쟁에 참가한 기사들이 자신의 가문을 표시하기 위해 방패에 줄을 두른 것이 효시로, 지체 높음을 상징하는 표시이기도 하지만 본교 휘장에 는 영원한 단합을 의미하는 뜻으로 채택되었다. 


그리고 색깔이 황금색으로 된 것은 과거 마닐라삼으로 등산용 줄의 색이기도 하지만 나일론으로 된 줄이 등산용으로 처음 사용되었을 때도 채택되었던 색이기 때문이다. 


가운데 안정을 의미하는 하늘색 바탕에 자리잡은 세 봉우리는 본교가 자리한 도봉산을 상징하는 주봉 (왼쪽), 선인봉(가운데), 우이암(오른쪽)을 함축해서 그린 것으로 설립위원 대표인 안광옥 부교장이 촬영한 사진을 원본으로 도안되었으며 산. 학생. 교수라는 등산학교를 상징하는 의미(뜻)도 함께 들어있다. 


가운데 하얀 리본 형태의 띠 모양은 우리나라를 영원히 떠받드는 의미로, 가운데의 1974라는 숫자는 개교년도를, 그리고 아래 부분의 반원형의 하얀 띠에는 본교의 영문표기가 모두 검정색으로 들어가 있으며 그 사이에는 번영을 상징하는 노란색의 빗살무늬 바탕에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태극문양이 중심에 위치해 있다. 


이 휘장은 개교 당시 강사로 참여했던 홍익미대 도안과의 문우식교수가 디자인한 것이다. 문우식 교수는 홍대미대 출신으로 국내와 일본에서 수차례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현재 한국디자인실험작가협회 고문을 비롯 여러 미술관계 단체에 관여하고 있으며 국립공주대학 미술교육과에 출강하고 있다. 


또한 이 휘장은 수료를 상징하는 배지로 제작되어 각 반마다 그 색깔을 달리해서 수여되고 있다. 정규반 수료배지는 단순하게 전체가 은색으로 태극 문양만 칠보가공되어 있다. 


암벽반 수료배지는 원 안을 하얀색으로 하고 도봉산 상징을 검은색으로 아래의 리본은 하늘색 그리고 태극문양을 칠보가공되어 있다. 동계반 수료배지는 원 안을 하늘색으로 하고 도봉산 상징을 하얀색으로 아래의 리본은 노란색 그리고 태극문양이 칠보가공되어 있다. 


● 학교로고



본교를 표기하는 韓國登山學校라는 독특한 필체의 한자 로고타입(Logo - Type)은 개교 당시 국회사무처에 근무하던 해정(海丁) 박태준 선생이 권효섭 설립위원의 의뢰로 한자의 통일을 위해 진시황제가 전서(篆書)의 번잡함을 생략해서 만들었다고 하는 예서(隷書)체로 써준 것이다. 


해정 박태준 선생은 과거 십여 차례가 넘는 국전 입선을 비롯 국전 심사위원과 심사위원장 등을 역임한 경력이 있다.


● 한국등산학교 설립 위원 및 참여자


설립위원 : 권효섭, 안광옥, 이숭녕, 강호기, 김경배, 김인섭

초대교장 : 권효섭

역임강사 : 권순호, 김갑용, 김경호, 김도섭, 김명수, 김병준, 김상기, 김영도, 김영섭, 김원모, 김정호, 김종욱, 김호진, 김범모, 문남길, 박봉래, 박찬민, 백경호, 백동욱, 백창수, 손경석, 신동간, 오석환, 유성원, 유창서, 이상천, 이용규, 이우형, 이원영, 이의현, 이재근, 이재하, 이종호, 이창호, 조용식, 조희덕, 최창민, 한우식, 홍건식, 임만재, 조재형, 장경덕, 배광식. 최희승, 서성식  


● 한국등산학교 교육 과정


정규반  - 시기 : 봄반 4 - 6월, 가을반 9 ~ 10월
- 기간 : 6주(매주 토, 일요일)
- 장소 : 도봉산 등산학교 일원 및 북한산
- 인원 : 60명
- 과목 : 이론 - 산악 운동의 방향 외 23과목
실기 - 확보법 외 9과목 암벽반  - 시기 : 8월중
- 기간 : 6박 7일
- 장소 : 설악산 일원
- 인원 : 60명
- 과목 : 이론 - 암벽등반론 외 5과목
실기 - 확보법 외 7과목 동계반  - 시기 : 1월중
- 기간 : 7박 8일
- 장소 : 설악산 일원
- 인원 : 60명
- 과목 : 이론 - 동계등반론 외 7과목
실기- 프론트포인팅 외 5과목 특별반  

- 시기 : 기존 교육과정 외의 기간
- 기간 : 피 교육단체의 요청에 의함
- 장소 : 도봉산 등산학교 일원을 우선적으로 함
- 과목 : 피 교육단체의 요청에 의함


● 스키 강습 

취 지   :

산악인의 필수 여건이며 겨울 스포츠의 꽃이라 할수 있는 스키강습회를 실시 했다. 

 

요 강   :
횟 수일 시장 소모집인원
1회1986. 2. 15 ~ 16북설악알프스 스키장80명
2회1987. 2. 21 ~ 22북설악알프스 스키장80명
3회1988. 2. 27 ~ 28알프스 리조트80명
4회1989. 3. 4 ~ 5알프스 리조트181명
5회1990. 3. 3 ~ 4알프스 리조트218명
6회1991. 1. 21 ~ 23수안보 오로라 밸리 스키장94명
7회1992. 2. 29 ~ 3. 1알프스 리조트80명
8회1993. 2. 20 ~ 21알프스 리조트43명
9회1994. 2. 26 ~ 27대명 스키장70명
10회1995. 2. 25 ~ 26진부령 알프스 스키장

 


도봉산장천막 강의장 마지막 강의를 마치고...

학교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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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식 당시 입교선서 장면
[ 초창기 ]

 

한국등산학교가 설립된 것은 1974년 6월 15일, 뜻있는 산악인들이 후배 산우들을 위한 지도교실을 세운 이래 1982년까지 1,500여명의 수료자를 냈다. 도봉구 山3 1번지의 도봉산장을 사용하는 지금까지도 산악인들의 순수 열정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개교시 학교의 조직은 초대교장에 권효섭 설립위원 대표가, 초대 부교장은 안광옥 설립위원 대표가 맡았으며 대한산악연맹에서 가맹 단체회원 등산교육을 위해 매년 여름 실시하던 하계산간학교와 앞서 언급한 겨울등산학교에 깊이 관여했던 강호기 설립위원이 초대 학감을, 총무부장에 김경배 설립 위원, 교육부장은 김인섭 설립위원이 맡았다.


개교 당시 참여한 강사는 5인의 설립위원(권효섭, 안광옥, 강호기, 김경배, 김인섭)과 손경석, 김원모, 이우형(작고), 백경호, 박봉래 등이 강사로 김호진, 신동간, 이원영, 홍건식, 전재운(작고) 등이 실기강사로 참여했다. 개교 후 최창민, 문남길, 김도섭, 김갑용(도미), 김시훈, 조용식(도미), 최태현, 이종수, 백동욱 등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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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장에걸린 개교식안내 현수막

개교시의 교육과목은 산악운동의 방향(권효섭) , 한국등산사(안광옥), 등산윤리(이숭녕), 보행론(김경배), 짐꾸리기(김인섭), 반공교육(치안본부 대공과), 알피니즘의 역사(손경석), 응급처치(대한적십자사), 독도법(이우형), 산악운동의 진로/초보자의 자세(권효섭), 등산용어(김원모), 자연보호론(산림청), 기초장비론(김인섭), 파트너십(강호기), 암벽등반론/확보론(백경호), 일반등산론(계획) /매듭법(강호기), 식량론(이원영), 기상학(관상대/ 현 기상청) , 사진학(김조현, 이종호) 등으로 출강한 강사들의 수준은 일반대학의 전 현직교수 출신들로 이루어져 한국등산대학이라고 할 정도의 수준 높은 교육이 실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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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식에 참석한 내빈들과 입교생들 <도봉산장 內>
그러나 이렇게 산악교육의 완벽한 조건을 갖춘 본교가 일반교육의 잣대로 평가한 교육청으로부터 정식승인을 받지 못해 결국 10년간을 설립자인 초대 교장의 사회적 지위와 참여한 산악계 인사들의 인지도로 유지되고 운영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또한 그 10년 동안 몇몇 개인의 희생에 의해서 운영되어 왔다. 그런 힘든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설립시 연락처가 광교의 雪山莊에서 중구의 다동 대웅 빌딩과 중구 태평로 서신빌딩 등으로 자주 바뀐 것이 재정상의 어려움을 대변해 준다.

개교 후의 국내 산악계는 1977년 1월 당시 국내 산악계 최대의 과제였던 토왕성빙폭이 박영배, 송병민에 의해 초등되고 9월에는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8 , 8 4 8 m )에 고상돈이 국내 최초로 오른다. 그때가 마치 수출 100억불을 달성하는 그야말로 '한강의 기적'을 이룩해 나아가던 시기였다. 따라서 1972 년 마나슬루(8,163m) 대량조난으로 히말라야원정에 대해 싸늘한 눈빛을 보내던 사회의 눈도 많이 부드러워져 1980년대 초부터 국내 산악계는 히말라야 붐에 휩싸인다. 

그러나 본교는 날이 갈수록 어려워져만 갔다. 시 간이 흐를수록 수강생은 증가했으나 학교운영은 재정적으로나 인적으로 어려워져 갔다. 당시의 상황을 日刊스포츠( 1 9 8 2년 1 1월 1 0일)에 실린 '등산학교' 란 표제의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 記事內容-

 

"한국등산학교가 설립된 것은 1 9 7 4년 6월1 5일, 뜻있는 산악인들이 후배 산우들을 위한 지도교실을 세운 이래 1 9 8 2년까지 1 5 0 0여명의 수료자를 냈다. 도봉구 山3 1번지의 도봉산장을 사용하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산악인들의 순수 열의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신문기사의 마지막 구절처럼 순수 열의만으로 학교를 지탱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1983년 강호기 학감의 미국이주로 공석이 된 학감에 이우형이 취임 하면서 학교운영을 활성화해 보자는 뜻으로 권효섭 교장, 안광옥 부교장, 이우형 학감, 최창민, 김경배, 문남길, 이종범이 각각 50만원씩 부담하여 시청앞부근의 서신빌딩 602호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운영비 충당을 위해 당시 등산화 제조업체인 R.F의 장경신(초급반1회) 사장의 배려로 R.F등산화 판매권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이런 시도도 큰 변화를 가져 오지 못해 2년여만에 실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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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식에 참석한 내빈들과 축하케익 절단장면 <도봉산장 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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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식을 마치고 난 후 기념촬영 <도봉산장>

이때의 사정에 대해 당시 월간 山의 박인식 기자는 '한국등산학교 逆境1 0년 다시 門을 열 것인가? ' (월간 山 1985년 4월)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썼다.

 

등산교육의 '정통'임을 자랑하던 한국등산학교(교장 권효섭)가 작년 6월 제2 0회 정규반 교육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1974년 6월 15일 개교한 한국등산 학교는 지난 10년 동안 정규반 792명, 암벽반 305명, 동계반 420명, 그리고 수탁반에서 297명 등 모두 1,814명의 졸업생을 배출해 왔다. 한국등산학교에서 전문등산에 대한 기초를 다진 이들 졸업생들이 각 단위 산악회로 흡수되며 한국 산악계의 저변 확대와 등산운동의 질적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을 다들 인정하고 있었기에 등산학교의 폐교 소식은 산악계에 상당한 충격을 주고 있다.

사실상 한국등산학교는 관계자 몇사람의 희생 위에 그 동안 존재해 왔었다. 사단법인 대한산악연맹과 한국산악회의 관련부처인 체육부나 문교부로부터 행정적으로나 재정적인 지원을 받지 못한 상태 에서 몇 개인의 힘으로 10년을 끌어 왔던 것이다.

 

이 기사를 뒷받침하는 사례로 1984년 여름, 제14회 암벽반과 가을에 실시해야 할 제2 2회 정규반을 실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당시 기사 내용처럼 학교를 폐교한 것은 아니었다. 실상은 한국등산학교가 설립된 것은 1974년 6월 15일, 뜻있는 산악인들이 후배 산우들을 위한 지도교실을 세운 이래 1982년까지 1,500여명의 수료자를 냈다. 도봉구 山 31번지의 도봉산장을 사용하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산악인들의 순수 열의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성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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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에 활동했던 강사들

 

1985년 초에 재정 부족과 학교운영에 따른 문제로 인한 일시적인 휴교조치 이후 실제로 학교를 이끌어나가던 권효섭 교장은 학교를 합법화시키고 전담직원을 두기 위해서는 본인이 회장으로 있는 서울특별시 산악연맹 부설 등산학교로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고 새 출발을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서울특별시 산악연맹은 정관 제4조 제6호 및 제47조의 규정에 의거 '한국등산학교 설치 규정'을 1985년 4월 3일자로 제정하고 조용식 시연맹 사무국장을 1985년 5월 6일자로 등산학교 교무 주임에 임명하여 겸직하게 하였다.

 

등산학교는 임원진과 강사진을 소폭으로 개선, 산악인들의 요청에 부응하기로 했으며 또한 한국등산학교 설치규정에 따라 등산학교 후원회와 별도로 자문위원회(이우형, 최창민, 이종범, 문남길)가 구성되고 임직원으로 권효섭 교장, 최석모 총무이사가 담당이사로 겸직했다. 새롭게 출발한 본교의 학과목과 담당강사는 산악운동의 방향(권효섭), 한국등산사(안광옥), 등산윤리(이숭녕), 짐 꾸리기(이성환), 보행론(문남길), 막영법(이종범), 조난대책(이우형), 기상학(이우형) , 매듭법(김종욱), 기초장비론(문남길), 파트너십(박봉래), 알피니즘의 역사(손경석), 암벽등반론(김종욱), 확보론(문남길), 등산의학(장경덕), 자연보호론 (내무부 자연보호 담당관), 등산식량(신동간), 등산용어(김원모), 독도법(이우형), 사진학(이종호), 구급법(대한적십자사), 암벽등반론(김경배), 특강(김영도) 등 이렇게 다시 편성된 학과목 중 그해 가을 제2 3회 정규반에서는 자연보호론은 산림청에서 내무부 자연보호 담당관으로, 기상학은 현재 기상청인 중앙기상대에 협조를 의뢰 예보과에서 강의를 맡게 되었으며 사진학은 이훈태와 백승기로 강사가 바뀌었다.

 

치안본부 대공과에서 담당했던 반공강의는 1981년 봄, 이숭녕 박사의 등산윤리는 1985년 가을부터 시대 변화에 따라 폐강되고 1977년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지휘했던 김영도 대장의 특강이 신설되었다.

 

또한 1986년 가을(제25회 정규반) 체력관리(정충구), 장비론(최철호), 1990년 봄(제3 2회 정규반) 산악도서소개(김법모), 1991년 봄 (제34회 정규반) 암벽 그레이드 및 스포츠클라이밍(홍옥선) 과목이 신설되었다. 교무주임이었던 조용식 후임으로 1987년 봄(제2 6회 정규반)부터 1988년 1월(제13회 동계반)까지 권순호가 1988년 봄(제28회 정규반)부터 1989년 1월(제14회 동계반)까지는 이규한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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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반 교육에 참가한 강사들
1989년 봄(제30회 정규반) 부터 1990년 1월(제14 회 동계반) 까지 김정호, 1990년 봄(제3 2회 정규반) 부터1991년 봄(제34회 정규반) 까지 전영래가, 1991년 여름(제20회 암벽반) 부터 까지 서성식과장이 실무를 처리해 왔으며 2000년 4월 18일 2대 교장으로 이인정 현 대한산악연맹 회장이 취임하면서 2002년 3월 18일 사무실을 강남구 역삼동 소재 산악문화회관으로 이전하고 산악계 인사들을 초청해 현판식을 가짐으로써 독자적인으로 사무실을 운영 하게 되었다.

 

서울특별시 산악연맹 교육기관으로 편입된 직후부터 1992년 1월까지 최석모 부회장(현 시연맹고문)이 교육담당 이사를 겸직했으며 후임으로 이종범 이사가 교육이사를 담당해 오다 이인정 현 2대 교장 취임을 계기로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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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산악구조대 발족에 따른 암벽등반교육 실시장면
정규반의 실기교장은 개교시 본교 교사의 남쪽 아래 계곡 일명 짱구바위 부근의 바위를 이용하다가 장비의 발전 등으로 점차 북상, 현재처럼 교사 북쪽까지 진출해서 사용하고 있다. 정규반 입교생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4주차의 백운대 진출은 1974년 가을 제2회 초급반부터 시작되었다. 이 교육장은 1974년 여름 이곳으로 하산하던 백경호 강사가 발견, 강사들이 점검한 뒤 교육장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5주차 일요일 아침, 도봉동 버스종점에서 19번 시내버스를 대절 우이동으로 이동해서 교육을 실시하다가 1985년 봄부터 아침체조 대신 관음암을 거쳐 우이주능선을 통해 우이동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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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권금성에서 실시되었던 암벽반 교육장면
1986년 여름 제1 5회 암벽반에서 야간등반 및 비박교육을 해본 결과에 고무되어 1987년 봄부터 시기를 4주차로 변경하여 토요일 이론 강의가 끝난 22시부터 관음암을 거쳐 우이주능선아래 계곡에서 비박후 우이동을 거쳐 백운대로 진출하는 것으로 교육장이 자연휴식년제 구간으로 지정되기 직전인 2,000년까지 교육이 진행되어 왔다.

 

암벽반은 여름에만 개설되는 강좌로 주로 지방에 거주하는 이들과 정규반을 수료한 이들을 대상으로 암벽등반 기술습득 차원에서 실기 위주의 교육이 실시된다.

개교 후 지금까지 설악산 권금산장을 교사로 하고 주변 암벽에서 실기를 연마하고 있으나 1983년 제13회 암벽반은 유일하게 북한산 백운대 에서 실시되었다.

 

그리고 지난 1986년 여름 제1 5회 암벽반에서 처음으로 야간등반과 비박을 실시했다. 그리고 1995년 여름 제24회 암벽반부터는 교육 닷새째 새벽 권금산장을 출발 도보로 울산암까지 진출한 뒤 조별로 암벽등반을 실시하고 다시 권금산장으로 귀환하는 교육과정이 신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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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동계반 교육중 동산장 강당에서 진행된 이론강의장면
동계반 역시 지방에 거주하는 이들과 정규반이나 암벽반을 수료한 이들 뿐만 아니라 빙벽등반과 동계등반 기술을 배우고 싶은 산악인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교육으로 개교시부터 플랫푸팅(일명 프렌치 테크닉) 기술 위주의 기술을 교육했으나 1980년대 중반부터 외국의 등산장비 수입 자유화로 특수한 등산장비 구입이 쉬워져 1986년 겨울 제11회 동계반부터 프론트 포인팅(일명 오스트리아식) 기술이 정규과목으로 채택되었다. 그리고 겨울철 이상난동으로 설악산에 얼음이 얼지 않고 눈이 오지 않아 1988년 1월 13회 동계반은 속초해수욕장 모래사장에서 아이젠을 착용하고 교육 받은 일화가 있다. 

 

또한 설악동 부근에 눈이 귀할 경우 근처 논바닥에서 교육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1993년 1월 열린 제18회 동계반은 계속된 폭설로 인한 눈사태의 위험 때문에 양폭산장에 고립되었으며 15일 새벽에 일어난 눈사태에 매몰된 광주보건 전문대생 5명을 강사와 학생 전원이 구조작업에 나서 구조했으나 1명은 끝내 사망했다.

 

이 사고로 다음날인 수료식날(일요일) 하산, 일요일밤에 설악동을 출발 월요일 새벽에 서울로 귀경한 적도 있었으며, 1998년 1월 열린 제23회 동계반은 설악산 일원에 내린 폭설로 인해 양폭산장 진출을 못하고 설악동의 동산장여관에서 숙박하며 설악동 근처에서 교육한 개교이래 최초의 기록을 세웠다. 

본교에 유학한 외국학생으로는 1982년 1월 제8회 동계반에 대만의 건행등행회(中華民國建行登行會)의 회원 8명이 있다. 이들은 인솔단장 관진민(關振民)을 비롯 9명이 내한하여 단장을 제외한 8명과 현지 교민 곽정관 씨가 매니저 겸 통역으로 교육에 참가했다. 교육 중 노방가(盧芳嘉)학생이 빙벽에서 미끄러져 다리를 다치기도 하였으나 모든 과정을 8명 전원이 수료했다. 이들은 귀국 후 감사장을 보내왔다.

 

이렇게 조금씩 변화해 오면서 어느덧 본교는 개교 2 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개교일자에 맞추어 당시 입교생인 정규반 제40회 학생들과 본교 졸업생 그리고 산악계를 비롯한 각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1994년 6월 15일 오후 6시 30분 소공동 덕수빌딩에서 성황리에 개교 스무돌 행사를 치루었다. 또한 개교 20주년 기념으로 본교에 관한 언론기관의 보도내용과 그 밖의 자료를 모아 소책자인 '스무돌'을 발간했으나 급히 제작하느라 여러 가지로 부족한 책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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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세존봉을 스키등반으로 길을 뚫고있는 강사진

이로부터 3년 후인 1997 년 5월 7일, 대한산악연맹이 각 시도연맹에서 운영 하는 등산학교의 운영의 통일을 위해 1996년 11월 6일자로 시달한 등산교육기관의 설치와 운영에 관한 규정에 따라 서울특별시 산악연맹 이사회에서 한국등산학교 설치규정을 개정했다. 따라서 학교 육성발전과 운영을 협의하기 위하여 운영위원과 자문위원 제도를 신설하고 학교 임원중 교감, 교무주임, 서무직원, 교관의 직책을 폐지하고 교무담당, 실기담당, 서무담당으로 축소 개편하였다. 

 

또한 1997년 5월 6일, 서울특별시 산악연맹 제5 차 이사회에서 의결된 한국산악연수원 설치규정은 이를 폐지하고 이 규정을 준용토록 했다. 이에 따라 1997년 9월 1일자로 운영위원에 이인정, 강호기, 최석모, 김영기(북한산국립공원 관리소장)가 추대 되고 교무담당 이종범, 실기담당 문남길, 서무담당 서성식이 위촉되었다.

 

이에 앞서 1997년 8월 8일자로 유창서, 장봉완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하였다. 그리고 1996년 가을 제45회 정규반부터 성적이 우수한 수료생에게 수여되는 서울특별시 산악연맹회장상, 대한산악연맹 회장상, 한국산악회 회장상이 신설되었다.

1997년 4월에는 제24회 정규반 수료생 답사부터 제2 2회 동계반 수료생 답사까지 모아 '둥지를 떠나면서 남긴 辭綠'을 발간했다.

 

이렇게 운영되어 오던 한국등산학교는 2,000년 4 월 18일 제2대 이인정 교장이 취임함으로써 변화의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이종범 교무가 교감으로 임명되면서 개교 30주년을 맞이해 대규모의 강사해외원정 계획과 개교 30주년 기념 행사 개최, 30주년 기념사를 발간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2002년 제 28회 동계반 교육을 실시 하는 과정에서 장비론을 강의해 오던 최철호 강사가 사무국장으로 임명되면서부터 한국등산학교 사무실의 역삼동시대가 전개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개교 30주년 기념 해외원정실시와 한국등산학교 후원회 발족, 개교 30주년 기념행사 그리고 분단 이후 최초로 제30회 동계반 교육을 금강산에서 실시하는 등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시도와 변화를 꾀하고 있으며 교과과목의 통폐합, 새로운 교과과목의 편성, 교육시간의 조정등 지속적으로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제30회 동계반은 국내외 언론의 지대한 관심속에 북녘 금강산에서 치루어 졌다. 30회 동계반은 분단 후 최초로 금강산에서 동계등반기술을 교육한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등산을 통한「남북교류」라는 최초의 이정표를 세운 성공적인 행사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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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옥류동 계곡에서 실시된 활락정지 및 피켈타격 훈련
전국에서 지원한 많은 동계반 지원자들 중에서 선발된 60명의 교육생과 25명의 강사진 그리고 1 0명의 취재진과 내빈들을 동반한 100여명의 인원은 금강산에서 폭설로 뒤덮힌 세존봉을 장봉완, 김남일, 김현중 강사가 산악스키로 루트를 개척함으 로써 많은 화제를 모았으며 산악관련 월간지에 특집으로 자세히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동안 정규반 교육과정에 편성되어 있던 백운대 슬랩교장은 교육장이 자연보호 휴식년제 구간으로 지정됨에 따라 교장을 변경하여 현재는 오봉에서 야간산행과 비박훈련을 겸해 실시하고 있다.

 

한편 설악산에서 계속하여 실시해 오던 암벽반 교육은 2 0 0 0년 2대 교장 취임을 계기로 설악산에서 교육을 실시하는데 따른 인원과 장비의 이동과 철수로 2일간의 일정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검토가 진행됨에 따라 심사숙고 끝에 2003년부터 북한산 일원에서 암벽반을 개최하기에 이르렀으며 바야흐로 암벽반 교육의 북한산 시대가 시작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2005년 3월에는 장봉완 서울시 연맹 부회장이 한국등산학교 학감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기존의 교육과정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와 변경이 가속화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분단이후 최초로 북측 금강산 산악구급 봉사대원 교육실시

 

이땅에 최초로 등산전문 교육기관으로 첫걸음을 내딘지 30여년에 결처 한국등산학교는 지금까지 8천여명의 수료생을 배출하였으며 등산기술 그 자체 보다는 올바른 산악인의 자세를 가르치는데 중점을 두는 등 여타 등산학교와는 다른 차별화된 교육관을 견지해 왔다.

 

역사에 남을 금강산관광이 시작되면서부터 남측 산악인들의 금강산방문이 시작되고 이들에 대한 안전 또한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면서 남측에서 선발 된 산악인들에 의해 구조업무가 진행되어 오던 중 2005년에 들어서면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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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측 봉사대원들과 환자 들것 후송 교육장면
즉 금강산 관광객들에 대한 안전과 구조업무를 북측에서 선발된 구조대원들이 담당하게 됨에 따라 이들에 대한 교육이 시급한 현안으로 제기되었던 것인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분단이후 30년 만에 최초로 동계반 교육을 금강산에서 실시함으로써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한국등산학교는 강사이면서 서울시산악연맹 구조대장으로 활동중인 김남일 대장과 현대아산 그리고 북측과의 긴밀한 협의를 통해 최초로 이들 북측 구조대원들을 대상으로 산악안전에 관한 교육을 실시키로 합의를 이끌어냄으로서 동계반 금강산 개최에 이어 북측 구조대원들 에 교육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이인정 교장과 장봉완 학감, 최철호 사무국장과 유성원, 김남일, 김경모강사 그리고 구조대의 서우석, 정상택대원으로 구성된 교육팀은 10월 11일 비무장 지대를 거쳐 금강산지역으로 들어가 5일간에 걸쳐 북측 전역에서 선발된 봉사대원 15명에 대한 교육을 예정대로 무사히 마치고 교육이수에 따른 수료증을 교부하고 15일 귀환함으로서 최초로 북측 사람들에 대한 전문등산교육이라는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으며 교육과 관련된 기사는 3개 월간지를 통해 특집으로 소개되어 많은 화제를 불러 일으키었다. 개교 30주년을 맞아 분단이후 최초로 금강산 에서 동계반 교육을 성공적으로 실시했던 한국등산 학교는 북측에서 선발된 봉사대원들에 대한 산악안전교육까지 완벽하게 마침으로써 교육을 통한 남북 산악문화교류에 커다란 획을 그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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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측 금강산 산악구급봉사대원 등산, 산악구조 교육실시(특별반) (2005. 10)

 

본교와 여성산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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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정규반 이외의 교육에서 언급했지만 개교 초기 본교는 여성들에게 금녀의 학교였다.

 

그래서 여성 등산강좌를 따로 실시했다. (정규반 외의 교육 참조) 그러나 전문등반을 하는 여성들을 위해 암벽반과 동계반에 한해서 개교 다음해인 1975년부터 입교를 허용했다. 그리고 여성들의 활발한 사회활동 참가 등으로 증가하는 여성 산악인들의 항의에 의해 1976년 봄(제5회 정규반)부터 입교가 허락되어 현재는 입교생의 1 / 3가량은 여성이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커졌다.

 

따라서 이렇게 늘어난 여성 산악인 숫자만큼 수료생도 많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 산악인중에는 본교 수료생이 많다.

 

대표적인 예로 1982년 봄 ' 82 선경여자산악회 람중히말 원정대' (대장 정길순)가 네팔 히말라야의 람중히말(6,986m) 등정에 성공, 등정자인 부대장 기영희(정규반1 0회)와 대원 윤현옥(정규반1 3회)은 국내 여성 최초로 히말라야 등정자가 되었다.
또한 원정대의 정길순 대장(정규반1 2회)과 대원 소유미(정규반1 6회)가 본교 졸업생이다.

또한 1984년 12월 안나푸르나(8091m) 동계초등정을 한 김영자(암벽반7회)가 있다.

 

다음해인 1985년 2월8일 조희덕(정규반1 7회)이 여성 최초로 국내 최대의 빙폭인 설악산 토왕성 빙폭을 초등정했다.

 

혹자는 당시 남성과 동반 후등을 했기 때문에 엄밀하게 따지면 초등반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이들도 있으나 국제산악계의 관례를 볼 때 부정할 수 없는 기록이다.

조희덕의 등반기록을 부정하는 이들이 인정하는 여성끼리만 오른 등반기록 역시 본교 출신의 이현옥(정규반 22회)이 남난희(정규반 16회)와 함께 1991년 2월 25일 11시간 50분만에 등반을 끝내 여성만에 의한 토왕성 빙폭등반을 기록했다.


남난희는 이 기록 외에도 1984년 1월1일부터 3월 6일까지 7 6일 동안 부산의 금정산을 출발, 태백산맥을 따라 진부령까지 단독종주를 했다. 이때의 기록은 '하얀능선에 서면' (수문출판사)에 잘 나와 있다. 이 기록은 많은 여성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줘 백두대간 단독종주에 나서는 많은 여성 산악인들이 출현하는 데 일조를 했다. 또한 그녀는 1986년 봄, 네팔 히말라야의 강가푸르나(7455m)를 여성 최초로 등정한 기록을 세웠다.

 

지현옥(동계반7회)은 1988년 5월 북미 최고봉 데날리(매킨리6194m), 1991년 7월 중국 신강 위그르 지구의 무즈타그 아타(7546m), 1993년 5월 여성 에베레스트 원정대장으로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8848m)에 한국여성 최초로 등정한 기록을 세웠으며 또한 1997년 파키스탄의 가셔브룸(8068m) ,1 9 9 8년 가셔브룸Ⅱ봉(8035m), 1999년 4월 안나푸르나(8091m)를 올라 8000미터 봉을 4개나 오르는 등정기록을 세우고 하산 중 추락, 사망했다.


 

강사 해외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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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교 강사의 해외원정 역사는 꽤 오래된다.

 

개교 다음해인 1975년 가을, 설립위원인 김인섭 과 강사 이원영이 1977년 가을, 에베레스트 원정을 위한 정찰대(대장 최수남)로 파견되어 1977년을 대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6년 봄에는 마나슬루 (8163m) 3차 원정대(대장 김정섭)에 설립위원 김경배가 지원대장으로 강사인 홍건식(장비담당)과 김도섭(식량담당)이 대원으로 참가했으나 기상악화와 대원간의 갈등으로 인해 7700미터까지 진출하고 등반을 포기했다. 그러나 이러한 두 번에 걸친 히말라야 원정에 참가한 강사들은 본교의 강사 자격이 아니라 개인 자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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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 30주년 (구)소련 코뮤니즘봉 등반중 B.C에서 (2002)
공식적인 본교 강사 자격으로 해외원정에 참가한 경우는 우리 산악인 최초로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에 오른 1977년 가을, 한국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가한 이원영 대원(식량담당)이 최초였다.

특별한 사례로는 김경배 설립위원이 본교 졸업생 들로 이루어진 국내 최초의 여성 히말라야 원정대인 ' 82 선경여자산악회 람중히말(6986m)원정대'에 매니저로 참가 기영희, 윤현옥, 대원이 2회에 걸쳐 등정, 국내여성 최초의 히말라야 등정자가 배출되는 데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그 후 히말라야를 비롯한 해외의 여러 산에 많은강사들이 다녀왔지만 모두 개인 자격으로 참가한 것이었다.

 

외국의 등산교육기관을 공식 방문한 기록으로는 1986년 7월 하순 권교장과 이재하, 서성식 강사 그리고 본교 수료생 자격으로 박동철(정규반1 8회)이 일본 북알프스의 야리다케(槍岳 3180 m) 등산과 뵤부이와(屛風岩2565m) 암벽등반 그리고 다데야마(立山)에 위치한 문부성(우리의 교육부)등산연수소를 방문하고 후지산을 등산한 후 귀국했다.

 

1990년대 들어와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지자 본교 졸업생뿐만 아니라 일반 산악인들도 해외 산에 다녀오는 것이 산악계에 유행병처럼 만연되었다. 학교로서도 이런 산악계 현실을 무시할 수 없어 해외등반 실기교장을 찾기 위해 1990년 5월초 이재하,서성식 강사가 일본의 3대 암벽등반지로 유명한 다니가와다케(谷川岳)에 정찰을 다녀왔으며 1차 시도로 2달 후인 7월 14일부터 17일까지 서성식, 전영래 강사가 본교 수료생인 박연수, 유호성, 정세형, 최영일, 정희구, 한승희, 배미홍 등을 인솔, 다니가와다케 암벽등반차 도일했으나 장마철의 불순한 일기로 인해 암벽등반은 포기하고 7월 15일 도와이(土合)역을 6 : 00시 출발하여 통상적인 루트(西黑尾根) 를 따라 9:40 안개속에 정상에 오른 뒤, 데라가에히라(天神平)스키장과 연결된 능선(天神尾根)을 따라 하산, 스키장에 12 : 00도착 로프웨이(케이블카)를 이용 하산했다.

 

이 후, 해외교장 답사작업은 한동안 답보 상태에 머물었다가 2년 후 미진했던 다니가와다케 지역을 다시 답사하기로 하고 1997년 7월 대규모의 강사진을 다니가와다케에 파견했다. 이종범 교육이사 외 11명의 강사가 7월 16일부터 2 0일까지 4박5일간 다니가와다케를 다시 찾았다. 7월 16일 밤 도와이 역에 도착 역사에서 숙박을 하고 17일 오전 11시 다니가와다케에서 가장 많은 조난자를 낸 이찌노구라자와(一の倉澤)의 츠구이다츠이와(衡立岩)중앙릉 일대에서 다음과 같은 조를 나누어 등반을 시도했다.

 

  A조: 이종범, 마운락, 김상기, 김경호 (츠구다츠슬랩 오른쪽)

  B조: 문남길, 최태현, 김정호, 남동건(중앙릉)

  C조: 이재하, 김법모, 최철호, 박찬민 (츠구다츠슬랩 중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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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마운틴 레이니어 B.C에서 기념촬영 (1997)
C조의 루트는 슬랩이 끝나는 지점에서 B조가 등반하는 중앙릉과 만나게 되어 합류등반을 계속했으나 50여 미터를 더 오른 뒤 직벽 때문에 등반이 불가능해 오후 2시 B조가 올라온 리지를 따라 하산, A조 역시 극심한 낙석 때문에 등반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결국 강사회의를 열어 낙석 때문에 암벽등반 교육장으로는 부적합하다는 의견일치에 따라 더 이상의 정찰 및 등반을 중지하기로 결정하고 철수했다.
 
1997년 7월에는 젊은 실기강사들이 미국 워싱턴 주 캐스케이드 산군의 최고봉인 레이니어(Rainier 4392m)등산과 유타주의 캐년랜드 ( C a n y o n l a n d )와 아치스( A r c h e s )국립공원의 암벽 등반을 하고 귀국했다.

 

당시 참가한 인원은 이재하, 마운락, 최태현, 최철호, 서성식, 오석환, 최연묵, 전서화, 소흥섭, 김남일, 이상록, 전영래, 김성태, 김재운, 박동신, 윤주호 등 16명이다.

 

당시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본교 주무를 보았던 조용식이 레이니어 등반에 합류 하였는데 레이니어 등산은 7월 1 2일 서울을 출발 당일(시차관계로) 시애틀에 도착, 13일(이하 현지시간) 시애틀에서 레이니어의 관문인 파라다이스( P a r a d i s e )로 이동, 10시 10분 파라다이스를 출발 16시 10분 캠프뮤어 (Camp Muir)에 도착하여 캠프를 설치하고 야영. 캠프뮤어에서 캐시드럴 갭(Cathedral Gap)을 거쳐 디스어포 인트 크 리버 루 (Disappointment Cleaver Route)를 택해 14일 23시 30분 캠프뮤어를 출발, 15일 06시 분화구로 진출 콜럼비아크레스트 정상에 오른 뒤 07시 하산을 시작 10시 캠프뮤어 야영장에 도착. 16일 아침 파라다이스로 전원 철수 후 이재하, 오석환, 김남일, 김성태, 김재운, 박동신, 윤주호 등 7명은 샌프란시스코로 나와 유타 주의 솔트레이크로 이동 캐년랜드와 아치스에서 7 월 20일부터 24일 까지 다양한 형태의 암벽등반을 경험하고 귀국했다.

 

2002년에는 개교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강사 해외원정을 구소련Pik Communizma에서 실시하였다. 중앙 아시아 연방들이 러시아에서 분리되 공화국으로 독립하고 난 후 최초로 시도된 이 원정을 통해 그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행정상의 착오를 경험하기도 했으며 소련봉괴 이후의 중앙아시아의 정치 경제를 직접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 참여대원 : 원정대장 - 이종범
                  대 원 - 장봉완, 마운락, 최태현, 최철호, 전서화, 임만재, 조재형

 

이 원정은 계속되는 악천후와 눈사태, 국제캠프의 운영부실등 복합적인 원인으로 인하여 C3 진출을 시도하다 철수하였다.

 

 

조난사한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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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교 강사중 산에서 조난사한 강사는 두 사람이 있다. 그러나 교육중에 사고가 나 순직한 것이 아니라 훈련 또는 개인적인 등반중에 일어난 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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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죽음의 계곡 종합훈련
아무튼 순직이 아니라 다행이지만 개인적으로 볼 때는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최초의 사고는 1977년 가을 에베레스트 원정을 대비하기 위해 대한산악연맹에서 실시한 훈련도중 1976년 2월 1 6일 설악산의 설악골에서 일어난 눈사태 사고로 사망한 전재운 강사다. 그는 개교 초기부터 실기강사로 출강했었다. 최수남 조장이 이끄는 제1조는 김호진(본교강사) , 전재운(본교강사), 송준송, 박훈규, 이기용으로 설 악골의 좌측 골짜기 일명 까치골을 지나 공룡능선상의 1275봉 안부에 설치할 제1캠프로 2월 15일 오후 5시경 폭설이 쏟아지는 가운데 진출했다. 그날 밤 훈련본부에서는 폭설에 의한 눈사태를 예측하고 전 훈련대에 철수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제1조는 무전기를 휴대치 못했다. 그때만 해도 무전기가 귀할 때라 여분의 무전기가 없었기 때문에 제1조만 철수명령을 모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적설량이 1미터 이상 쌓인 상황에서 야영지를 출발, 하산도중 까치골 통과시에 발생한 눈사태로 6명의 일행이 모두 매몰되었으나 김호진, 박훈규, 이기용만이 살아나고 최수남, 송준송, 전재운은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 조난사한 전재운 강사는 사고 당시 병역 의무중인 현역군인이었으며 군 입대 전 본교에 실기 강사로 참여했었다.

 

그는 입대 전 뛰어난 암벽등반가로 현재 난이도 높은 코스로 이름난 인수봉 거룡길을 처음 구상한 장본인으로 그가 조난사한 후에 후배들에 의해 거룡길이 개척되었다. 그로부터 오랫동안 강사가 산에서 조난사 하는 사고는 없었다. 그러다가 1991년 9월 22일(일요일) 본교는 제3 1회 정규반 개교 중이었으나 추석 연휴를 맞아 휴강 중이었다.

 

당일 오후 2시경 북한산 인수봉 하늘길 1피치를 선등하던 김진형 강사가 크랙등반 중 추락, 크랙에 설치한 추락방호용 SLCD 마저 충격으로 빠지면서 약 10미터 아래 출발지점으로 떨어져 뇌진탕으로 혼수상태가 되어 경희대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10 월 7일 사망했다. 김진형강사는 1985년 가을 정규반 23회 출신으로 1986년 봄부터 실기강사로 참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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