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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등산학교 정규97회 {등반체험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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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벽등반 체험기④] ‘마지막 수업’ 피 땀 눈물의 선인봉

암벽 매달려 정신의 밑바닥 느끼고 인생의 희로애락 맛봐…6주간 고난 극복의 ‘알피니즘’ 배워 
[일요신문] 클리프행어(Cliff Hanger). 밧줄이나 절벽, 끄트머리에 매달린 자, 생사의 기로에 놓인 사람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한국등산학교 6주 동안 32명의 교육생들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매주 클리프행어가 됐다. 일요일마다 암벽에 매달려 생사의 기로까지는 아니라도 순간순간 생사의 환희와 고통을 어렴풋이 체험했다. 실습 때마다 죽을 것 같은 공포와 함께 무사히 살아났다는 기쁨에 안도했다. 암벽등반의 매력은 찰나에 삶과 죽음, 환희와 고통, 안도와 불안, 성공과 실패, 강인함과 나약함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그 동시성에 있었다. 
#당황스럽기만 한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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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벽등반의 매력은 찰나에 삶과 죽음, 환희와 고통, 안도와 불안, 성공과 실패, 강인함과 나약함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그 동시성에 있었다. 사진=한국등산학교 제공 
6주 차 마지막 수업은 선인봉 등반이다. 인수봉 등반을 비 때문에 그런대로 넘겨버린 뒤 단계를 건너뛰었다는 생각에 걱정이 한가득이다. 그런데 ‘이런’, 펜 없이 시험장에 와 버렸다. 암벽화를 깜박한 것이다. 지난 주 비에 홀딱 젖은 암벽화를 말리다가 미처 챙기지 못하고 짐을 꾸려 버렸다. 꾸중 속에 강사에게 암벽화를 빌려 신었다. 제일 어렵다는 선인봉 등반을 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는 기대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빌려 신은 새 암벽화는 발에 맞지 않아 등반 내내 발을 들쑤셔댔다. 한 번도 신지 않아 전혀 길들여지지 않은 새 신발이다. 새 신발의 딱딱한 뒤꿈치가 아킬레스건을 계속 찍어댔다. 암벽에서 실력은 곧 신(발)력이라는 우스갯소리를 듣고 ‘아차’ 싶었다. 선인봉 등반 중 내 신(발)력은 엉망이었다. 아무래도 뒤꿈치가 다 벗겨져 피가 줄줄 나는 것 같았다. 그만 내려달라고 칭얼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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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는 가야겠는데 잡을 곳 디딜 곳은 마땅치 않고, 발은 아파 죽겠다. 그대로 있자니 점점 팔다리에 힘이 빠져 그나마 있던 자리에서도 버티지 못하겠고, 올라갈 수도 그렇다고 내려갈 수도 없는 상황과 계속 싸워야만 했다. 사진=한국등산학교 제공 
올라는 가야겠는데 잡을 곳 디딜 곳은 마땅치 않고, 발은 아파 죽겠고, 그대로 있자니 점점 팔다리에 힘이 빠져 그나마 있던 자리에서도 버티지 못하겠고, 올라갈 수도 그렇다고 내려갈 수도 없는 상황과 계속 싸워야만 했다.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 힘이 더 빠지기 전에 좀 더 힘을 내야 한다. 자력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면 진즉 포기하고 내려왔을 것이다. 하지만 혼자 내려올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일단 버티고 견디고 올라가는 수밖에 다른 길은 없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안 되는 바위였다. 결국 위에서 몸에 묶인 로프를 끌어 올려주는 힘을 이용해 겨우겨우 손을 옮기고 발을 디뎌 첫 구간인 선인봉 1피치에 도착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진땀을 흘리다가 결국 피를 봤고 기어이 눈물이 터졌다. 당황스럽기만 한 눈물. 울고 싶은 기분은 전혀 아니었다.

왜 이렇게 어려운 구간에 우릴 데려왔나 강사에게 화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되지 않는 일과 저질 체력에 실망한 것 같기도 했지만 강사와 동료 앞에서 애처럼 울 정도는 아니었다. 욕 한마디 내뱉으면 그만이었는데, 눈물은 왜 그치지 않고 계속 흐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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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바닥을 보니 초라하고 비겁한 정신의 밑바닥까지 보이는 듯했다. 당황스러운 고통이었다. 사진=한국등산학교 제공 

BTS(방탄소년단)의 ‘피 땀 눈물’의 가사가 떠오른다. ‘내 피 땀 눈물 내 마지막 춤을 다 가져가~ 내 피 땀 눈물 내 차가운 숨을 다 가져가~’. 암벽을 기어오르며 피 땀 눈물로 얼룩진 나의 춤사위, 턱까지 차오르는 불안한 숨과 절벽에서의 공포로 미칠 지경이었다.

오르지도 내리지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면초가의 형국에서 직면하는 것은 직벽뿐은 아니었다. 암벽을 오르며 본 것은 나의 밑바닥이었다. 강사는 인수봉야영장 침낭 속에서 암벽의 매력을 “스스로의 진면목을 볼 수 있어서…”라고 멋있게 말했는데, 실제로 마주한 나의 진면목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감정들이었다.

온갖 그럴듯한 허울들로 가려져 있던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본의 아니게 드러나 스스로를 직면하고 있었다. 육체의 바닥을 보니 초라하고 비겁한 정신의 밑바닥까지 보이는 듯했다. 당황스러운 고통이었다. 저항하는 마음은 고통을 배가시켰다. 아프기 싫다. 힘들기 싫다. 미끄러지기 싫다. 상처 나기 싫다. 못 하는 꼴을 남들에게 보이기 싫다. 온갖 싫은 마음들이 암벽에 함께 매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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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은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고 싶었는데, 단련되지 못한 몸은 천근만근이다. 사진=한국등산학교 제공 

나약한 신체에 비대한 머리. 마음만은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고 싶었는데, 가벼운 몸으로 암벽을 날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오르내리고 싶었는데, 단련되지 못한 몸은 여전히 천근만근이었다. 문득 “그림자가 굽었다고 그림자를 미워하지 말고 허리를 펴라”는 한 스님의 말이 떠올랐다. 날렵하지 못하고 우둔한 몸, 이제 와서 갑자기 어찌할 도리도 없는 이 몸을 탓하지 말고 정신을 일으키고 싶었다.
#암벽의 노래를 들어라

삶의 미지근한 물에 꽤 오랫동안 몸을 담그고 있다가 암벽을 만나고 “앗 뜨거워!” 온몸을 데였다. 온몸으로 자극을 받으니 삶이 저절로 환기가 된다. 6주 동안 매주 오기 싫은 몸을 억지로 암벽 앞으로 끌고 온 건 정신의 허기였다. 어쩌면 보이지 않던 진면목을 만나기 위해 무감각해진 마음을 이끌고 기어이 암벽까지 와야 했는지도 모른다.

“추락!”

옆에서 들려오는 비명, 추락한다고 해도 한두 발 미끄러질 뿐 로프에 매달려 있어 실제로는 추락하는 것도 아니건만,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밀려오는 두려움과 떨어지기 싫어 무언가 붙잡고 늘어지고 싶은 애착심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강사는 “암벽등반은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한 발 내딛는 것”이라 말했지만 두려움을 받아들이는 것에도 연습이 필요했다. 살면서 이토록 자주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었던가. 강사는 “추락 후엔 오히려 그 구간을 더 잘 오르게 된다”며 추락마저 즐기라고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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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벽등반은 인생의 축소판에 다름 아니었다. 스스로 디딜 곳을 찾아 탐색하고 고민하고 디뎌보고 실패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나아지고 나아간다. 사진=한국등산학교 제공 
암벽등반은 인생의 축소판에 다름 아니었다. 스스로 디딜 곳을 찾아 탐색하고 고민하고 디뎌보고 실패하고 시행착오를 겪고 나아지고 나아간다. 삶에는 개념이나 관념으로 배울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스스로 체험해야 알 수 있는 것들, 암벽등반은 개념으로는 알 수 없던 것들을 몸을 통해 스스로 배우게 했다.

누군가는 암벽등반을 “삶에 활기를 불어넣고, 새로 태어난 듯한 느낌을 주고, 깨달음을 준” 체험이었다고 말했다. 한국등산학교 정규반 다음 코스인 암벽반과 동계반 코스에 도전하겠다는 교육생들도 여럿 나왔다.

한국등산학교에서는 단순히 오르는 행위를 넘어 ‘알피니즘’을 가르친다. 등산의 본질은 정상이 아니라 고난 극복에 있다고 말한다. 알피니즘이란 오르는 과정 속에서의 불확실성과 불안을 극복하고 자기만의 창의적인 길을 개척해 나아감을 뜻한다고 했다. 자신의 알피니즘을 찾을 수 있다면 흐려졌던 인생의 길도 다시 보일까. 이제 암벽을 등지고 다시 생각한다. ‘내 삶의 알피니즘’은 무엇일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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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등산학교에서는 단순히 오르는 행위를 넘어 ‘알피니즘’을 가르친다. 등산의 본질은 정상이 아니라 고난 극복에 있다고 말한다. 사진=한국등산학교 제공  

암벽 도전은 처음엔 어린애 같은 호기심에서 출발했지만 6주 뒤엔 생각보다 진하고 뻐근한 여운을 남겼다. 삶이 무료하거나 길을 잃은 사람에게 암벽등반을 권한다.   

이송이 기자 runaindia@ilyo.co.kr  [이송이 기자는 서울특별시산악연맹 명예이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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