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교류위원회

2012년 에베레스트 사고기사(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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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성구 작성 1,776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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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교류이사 천성구입니다

프랑스 파리 잡지( Paris Match 6월 2012오)에 실린 에베레스트 사고기사를 번역하여 올려봅니다, 현장의 생생한 내용과 사진이 너무 실감을 주는 기사내용이네요.
이번 중동110주년기념 7대륙원정 발대식에서 대한산악연맹 이인정회장님께서도 안타까움과 잘못된 정책을 언급하신 내용이라 여러 회원님들에게 참고가될까해서 중동산악회 홈페이지(www.a-c-c.co.kr)에서 퍼 왔습니다..............

첨부된 File의 사진을 자세히보면 올라가는 사람 내려가는사람이 엉켜는 장면이 나옵니다...안타까운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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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 – 죽음의 혼잡

전설적인 봉우리를 정복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곳을 오르는 기다림속에 몇몇 사람들은 산소 부족으로 지치게된다.

산을 올라가는 사람들의 길고도 긴 줄이 하얀 눈위에 실루엣으로 이어져있다.
2012년 5월 19일 아침, 약 200명이 꿈에 그리던 세계의 지붕인 산봉우리를 올라가고 있었다. 이 사진은 1992년에 정상 정복에 성공했던 독일의 사진작가인 랄프 두즈모비츠( Ralf Dujmovits)가 찍었다. 그는 이번에는 정상에 오르는 일을 포기했다. 그는 이 사진을 찍고 있던 순간에 이미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본적이 없다. 그때 그곳의 모든 사람들이 다 살아돌아올 것 같지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4명이 죽음을 맞았다. 이번 시즌에만 6명이 극한의 상황에서 등반하다가 목숨을 잃고, 희생되었다.
혼잡한 상황속에 갇히게 되었고, 산소가 부족한 “죽음의 지역”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

예전에는 가까이갈 수 없었던 곳인 에베레스트가 최근에는 정복의 희열에 취하기위한 경솔한 관광객들의 놀이공원이 되어버렸다. 치명적인 공포가 될때까지.

(사진설명)
5월 19일 토요일 아침 9시, 7920m높이.
산악인들이 캠프4 를 떠나 정상을 향한 마지막 산을 오르고있다.

지옥에서 온 좀비같은 모습으로, 한남자가 환각에 빠져 모자와 장갑을 벗어던지고,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있었다.

추위에 얼어붙은 눈속에 버려진 사체가 있었다. 산드라가 처음 사체를 발견한 것은 2시간째 산을 오를때였다. 그녀는 선택의 여지도 없이 계속 산을 오를 수 밖에 없었다. 자동기계 인형처럼 뒷사람들앞에서 발을 앞으로 내디뎌야만했다. 몇미터 앞에는 2명의 사체가 더 있었다. 그들은 자일에 매달려있는채였다. 산드라는 앞으로 가기위해 그들을 넘어가야만 했다. 하얀 천당으로 여겨지던 곳이 하늘에 문이 열린 관이 되어있었다. 산드라는 감탄할만한 아름다움을 예상했지만, 끔찍한 광경을 만나게되었다. 그녀가 상상한 것과는 달리 악몽의 장면이었다. 그녀는 가능한 모든 시나리오를 생각하지않은 것은 아니었다.

캐나다 젊은 변호사인 산드라는 12년전부터 에베레스트의 정상에 오르는 것을 꿈꾸어왔다.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리우는 에베레스트을 오르는것, 바다보다 높은곳, 지구에서 가장 높은 곳, 8848미터의 높은곳에서 아래쪽의 지면을 감탄하면서 바라보고자했다.
그것은 어렸을때 아버지와 함께한 트래킹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녀가 꿈꾸어오던 최고의 소망이었고, 어렵게 노력하고, 잠재해있던 욕망이었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이여행을 도전하도록 의욕을 주었다. 34살인 그녀는 7개의 대륙에서 가장 높은 7개의 산정상을 정복하고자하는 야망을 가지고있고, 알래스카의 데날리(6194m), 아르힌테나의 아콩카구아(6962m), 러시아의 엘부르즈(5642m)를 이미 정복했다. 산드라는 극한 상황도 극복할 수 있는 훈련된 알피니스트이다. 그녀는 아프가니스탄의 캐나다 대사관에서 2년반동안 근무했다. 그녀는 히말라야의 7번째 하늘에 오르기위해 저금도 해놓았다. 이번 모험은 부상당한 캐나다 군인들을 돕기위한 Soldier On협회를 알리기 위한것이기도하다.

5월 19일 토요일. 중요한 날이 다가왔다. 산드라가 네팔에 온지 두달이 되었다. 약 6000미터높이의 얼음산 쿰부에 있는 베이스캠프에서 몇주를 보냈다.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대부분의 산악인들은 이곳에서 고산병과 산소부족 현상에 적응하는 훈련을 한다. 고산에서 겪게 되는 구토, 두통,현기증에 대비하기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산드라는 베이스캠프에서 산을 사랑하는 콜로라도 출신 미국인 연구원 존 케드로우스키등, 7명의 동료들과 친목을 다지며 보냈다. 5월 12일은 그녀의 생일이었다. 산악인 동료들은 그녀의 33세 생일을 보내기 위해 작은 케잌을 준비하였다. 형제같은 우정을 다지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산을 오를때는 각자 자기자신만을 믿고 의지해야만한다. 산드라도 잘알고 있었다. 어머니를 안심시키기위해 그녀는 개인 셰르파의 도움에 의지하기로했다. 그는 특히 산소통같은 그녀의 짐을 옮기는데 도움을 주었다. 짐들이 무거웠지만 반드시 필요한것들이다. 셰르파들은 육체적으로 산과는 친근하다. 그녀의 셰르파 락파는 에베레스트에서 이미 7번이나 정상에 올랐었다.

5월 19일, 아침 10시, 산드라와 동료들은 7920미터 지점, 캠프 4, 빙산의 측면을 4일에 걸쳐 걷고있었다. 그들은 “죽음의 지역”에 막 이르렀었다. 영하 40도까지 떨어진 기온에 구조요청을 할 수 없는 지역이다. 헬리콥터가 들어갈 수 없는 지역이다. 산드라팀은 정상에 오르는 것을 하루뒤로 미루기로 결정했다. 혼잡함을 피하기위해서였다. 그보다 몇시간전부터 백여명의 산악인들은 에베레스트를 향해서 몰려들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저녁9시, 산드라는 오리털 컴비네이션으로 포근하게 감싸고, 태양에 눈이 타는것을 막아주는 안경을 코에 걸고, 추락방지용 안전벨트를 허리에 감고, 발에는 아이젠, 손에는 피켈을 갖추고 마지막 공격을 위한 준비가 되어있었다. 1920년대에 에베레스트 정복에 도전했던 영국인 죠지 말로리의 겨울스웨터와 캐쉬미어로 된 쟈켓, 털모자와 사냥할 때 쓰는 가죽모자를 두겹으로 쓰던 시대와는 비교도 안될정도였다. 말로리는 1924년에 끝이 안보이는 눈속에 묻혀 실종되었다.

산드라는 자신만만하게 출발했다. 기온은 영하 15도 정도”밖”에 안되고, 그리 많이 춥지는 않았다. 몇몇 팀들은 이미 하산을 시작했다. 그녀는 그들의 램프에서 희미한 빛을 보기시작했다. 꽤 늦은 시각이었다. 그들이 떠난지 오랜 시간이 지난후였다. 그녀는 하산하는 몇사람들에게서 얼이 빠진 얼굴, 얼어있는 얼굴, 눈은 반쯤 감겨있거나. 동료들의 부축을 받으며 내려오는 사람들을 보았다. 지옥에서 온것같은 좀비들과 닮은 모습이었다. 몇사람들은 광란의 희생자같은 모습이기도했다. 산드라팀의 동료인 미국인 존은 환각의 상태에 빠진것 같은 한남자를 발견했다. 그는 모자와 장갑을 벗어던지고 죽음을 향해가는것 같았다. 경험이 많은 산악인으로써 위험에 처한 폴랜드 산악인을 구해보려고했지만, 격렬한 폭풍으로 인하여 되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극한 상황에 처했을때는 자신을 구하는것이 우선이었다. 산드라도 시속 100km에 이르고 점점 더 격렬해지는 폭풍에 그를 따라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발걸음에 집중했다. 한순간의 실수는 추락으로 이어진다. 죽을 수도 있는것이다.

새벽 3시쯤에는 2시간만 걸으면 정상에 이를 수 있었지만, 산드라의 셰르파는 그 고난을 끝내기로했다. 그는 갑자기 돌아서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내려간다”라고 외쳤다. 대답도 듣지않는 명령이었다. 돌아오는길은 아비규환이었다. 그들은 눈보라를 일으키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전진했다. 산드라의 얼굴은 폭설에 타들어갔고, 몸은 꽁꽁 얼어붙어갔다. 그녀의 산소통도 얼어붙어서 더이상 기능을 하지못했다. 그러한 고난속에서도 4캠프에 겨우 도착했다. 캠프에 이르러서야 팀동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몇몇은 충격을 받은 상태로 눈물을 흘리고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함께 였다.살아있었다. 정상을 포기했지만, 동료들을 모두 구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고집은 죽을 수 있는것이다.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산악인들은 해마다 점점 늘어가고있다. 모두 정상에 오르고 싶어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원정에 드는 비용은 점점 더 과도해져가고 있다. 일부는 20만 달러를 들여서라도, 1953년에 처음으로 이름을 남긴 뉴질랜드인 에드문트 힐러리같이 에베레스트의 기록에 이름을 남기고싶어한다. 그시절의 거대란 히말라야는 아직 아무도 오르지못한 처녀산이었고, 산의 정적이 주는 경이적인 아름다움과 전설적인 산봉우리로 모험가들에게 숭배의 대상이고, 티벳어로 쵸몰룽마라고 이름하는 기품있는 어머니의 눈산으로 불리어졌다. 힐러리와 그의 셰르파 텐싱 노르게이이후로 약 만여명이 정상을 향해 올랐고, 그중 약 4천명이 정상을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최근에는 에베레스트가 기록을 갱신하기 위한 공장같은, 놀이공원이 되었다. 많은 인파의 산악인들은 대부분이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가지만, 세계의 지붕위에서 사진을 찍고싶어서 가기도한다. 에펠탑이나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 꼭대기에 가는것처럼... 그런 관광객들의 무리들이 지나가고나면, 쓰레기들이 남겨진다 – 로프,포장지들, 빈 산소통들, 약품들, 쓰고남은 배터리등등의 쓰레기들이 자연의 풍경들을 헤치거나, 대자연의 산과 마주하여 자신을 돌아보는, 산을 오르는 중요한 의미를 잃어가게한다. 알피니스트 지망생들의 경험이나 체력조건들을 고려하지않고, 트래킹 제품회사들이나 네팔 정부에게는 뜻밖의 선물이 되고있을 뿐이다. 그들중에는 아이젠을 신어보지도 못한 사람도있다. 산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것을 생각지못하기도 한다. 에베레스트에서 2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1996년 5월 10일에는 폭설로 8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끔찍한 숫자도 강렬한 감동을 느껴보고자하는 사람들을 물러나게하지못한다. 5월 19일 토요일, 150명에서 200여명이 그들 일생의 위업을 실현시키고자 정복에 나섰다. 그들중, 33세의 네팔출신 캐나다 여성인 쉬리야 샤-클로리핀이 있었다. 그 젊은 여성은 수출입 회사의 중역으로 자신의 결심을 보여주고자했다. 그녀는 그전에 자동차보험금 인상을 반대하여 5일간 단식투쟁을 하여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기도했다. 그녀는 5월 18일 아침에 9개의 산소통을 가지고 출발했다. 그다음날, “죽음의 지역”인 남쪽골에 이르렀고, 정상에 오르고자하는 희망을 가지고 몇시간에 걸쳐 줄을 서서 가는 상황에 갇히게되었다. 많은 시간을 지체했고, 산소는 점점 부족해가고 있었다. 동료들이 그녀를 만났을때, 긴줄에 서서 기다리는 그녀에게 되돌아갈 것을 제안했다. 그녀는 거절했다. 그러나 그녀는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나는 가야만해, 꼭 가야만해”라고 겨우 말할수 있었다. 그녀는 정상에서 내려오는 동안 산소부족으로 죽게되었다. 같은 날, 3명의 다른 사람들도 죽었다. 55세의 중국인, 하 웬이의 사체는 쉬리야로부터 멀지않는 곳에서 발견되었다. 외과의사인 61세 독일인, 에버하르트 샤프는 고산증에 의한 뇌부종으로 죽었고, 44세 한국인, 송원빈은 고등학교 동창들과 함께 산에 올랐다가 기절하여 허공에 떨어져 죽게되었다. 그들중 한 죽음을 산드라가 정상에 오르는 길에 보게 된것이다. 그러한 충격과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첫번째 정상시도후 며칠뒤에 정상을 향해 다시 시도를 했다. 기운을 되찾았고, 다시 도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드디어 그 성배에 이르기전에 다시 한 사체앞을 지나야만했다. 캐나다국기로 덮힌 쉬리야의 죽음이었다. 산드라는 생각했다. “저것이 나였을 수도 있었겠구나”
- 프랑스 잡지 Paris Match 6월 2012호 기사를 번역한기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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