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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산친구] 서울대 문리대산악회 동기생 조규배·노익상·오호종
40년 만에 ‘표범 사냥’에 나선 60대 친구들 45년 우정의 원천은 대학산악부 시절의 같은 추억이 있기 때문
- 희희낙락 유쾌했던 표정들이 동시에 굳어졌다. 40여 년 만에 암벽등반을 한다는 이들이 선 곳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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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봉산 선인봉 표범길 앞이다. 지금은 표범길이 베테랑 클라이머가 되는 통과의례가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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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 1970년대 이들이 대학산악부원이던 시절의 표범길은 선인봉에서 가장 난이도 높은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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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지간히 실력 좋은 꾼이 아니면 감히 시도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길이다. 게다가 1피치 스타트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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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 홀드가 약간 멀고 비스듬한 바위 사면에서 시작하기에 선등으로 나섰던 이들이 떨어져 심심찮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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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목이 부러졌던 앙칼진 곳이다.
- ▲ 표범길 등반 전, 생소한 등반 장비를 착용하고 환담을 나누는 산친구들. 왼쪽부터 노익상·오호종·조규배씨.
“그때는 암벽화니 안전벨트니 하는 게 없었죠. 청계천에서 미군 군화를 사서 목을 잘라 신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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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게 바위에 잘 붙었어요. 당시만 해도 등산화가 귀했거든요. 이렇게 헬멧 쓰고 안전벨트 차고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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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도 오늘이 처음입니다.” 세 명의 산친구 중 가장 목소리가 크고 유쾌한 얘기로 분위기를 띄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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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단연 노익상(63·대한산악연맹 부회장)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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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재수를 하는 동안 중·고등학교 산친구들이 가입한 서울대 문리대산악회에서 같이 활동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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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대에 입학하고서도 인연을 이어가며 고려대생이 서울대 문리대산악회회원이 되는 희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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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기록하게 되었다. 노익상씨는 스스로 “규제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살았다”고 얘기하는 ‘괴짜’다. 그는 “<월간山>에 기사를 실을 때도 친구로 나온 것이니 회장이니 사장이니 하는 직함을 붙이지 말고 그냥 이름만 불러 달라”며 간곡한 협박을 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건 1966년, 대학교 1학년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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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부터 지금까지 40년 넘게 같이 산에 다니고 한 달에 3~4번은 만나는 오랜 친구 사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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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저희 세 명이 나왔지만 원래 자주 만나는 산악부 동기는 5명 정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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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규배(64·서울시연맹 회장)씨는 목소리만 듣고 얼굴만 봐도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정도로 가까운 친구들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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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문리대OB산악회장을 10년 넘게 맡아오는 동안 해외 트레킹을 많이 갔다. 1986년에는 산악회에서 요세미티 하프돔에 갔으며, 2004년에는 무즈타그아타, 2007년에는 킬리만자로, 2008년에는 엘부르즈에 다녀왔으며, 노익상씨와 함께 엘부르즈(5,642m)와 킬리만자로(5,895m)를 등정했다. “20살 때 워낙 성격이 내성적이라 그걸 바꿔볼까 하고 들어간 게 산악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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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고 보니 산악부에 들고 나서 성격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이렇게 오랜 친구들도 있고요.”
문리대산악부 동기인 오호종(63)씨는 졸업 후 산과 멀어졌다가 퇴직 후 다시 친구들과 등산하기 시작했다. 그는 “OB 때 친구들과 산행을 자주하진 않았는데 YB 때 정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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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익상씨가 결혼할 때에는 셋이 함께 부여에 있는 신부집에 찾아가 기어코 결혼 승낙을 받아냈고, 조규배씨가 결혼할 때에도 신부집이었던 마산에 함께 내려가 승낙을 얻어냈다. 이후 사회생활도 각자의 자리에서 성과를 거뒀다. 현재 조규배씨는 풍력발전기 전문업체인 (주)효림모라 대표이며, 노익상씨는 (주)한국리서치 대표이고, 오호종씨는 직장에서 퇴임해 안정된 시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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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노씨와 조씨는 산악계에선 잘 알려진 이들이다. 조규배씨는 1986년부터 시연맹 조직이사·총무이사·부회장·회장 대행·고문 등을 맡아오다 지난해부터 서울시연맹 회장을 맡았다. 노익상씨는 지금도 가장 왕성하게 산행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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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부터 해외 등반에 도전해 킬리만자로·엘부르즈·임자체(6,189m)를 등정했으며, 매킨리와 아콩가구아도 등반했다. 그는 대한산악연맹 부회장이며 우이령포럼 공동대표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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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범길 등반은 가문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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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익상·조규배·오호종씨의 암벽등반을 돕기 위해 나선 도우미는 서울시연맹 북한산산악조난구조대 김남일 대장과 대원들, 그리고 장봉완 서울시연맹 부회장이었다. “모처럼만의 선배들 등반이니 소홀히 할 수 없다”며 선등으로 올라 등반을 위한 맛있는 상을 차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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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피치만 등반하기로 하고 장비를 착용하고 사용법을 연습했다. 오씨는 볼라인 매듭으로 현수하강을 하던 대학 시절 이후의 등반은 처음이고 하강기를 쓰는 것도 오늘이 처음이다.
30m의 표범길 1피치, 사선 크랙 등반이 주를 이루며 레이백 자세로 올라야 하기에 완력과 기술이 필요한 구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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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갑이 넘은 이들이 등반을 하기에는 벅찬 도전이다. 크랙 양옆으로 걸림이 없는 비교적 매끈한 벽이라 등반하는 모습을 사진 찍기는 좋다. 다만 벽의 각이 세고 시야가 트여 있어 고도감이 심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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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창 때였던 YB 시절에도 난이도가 세서 못했던 벽이었기에 이들에겐 오랜만에 맛보는 긴장감이었다. 다만 그때와 달리 확실한 장비가 있어 안전한 등반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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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 중 가장 활달한 노익상씨가 용기 있게 먼저 나섰다. 스타트부터 고전이다. “바싹 당겨”하는 소리와 “아, 힘들다”하는 소리가 연신 선인봉에 울리며 시끌벅적 활달한 등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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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가다 쉬다를 반복하지만 기어코 종료 지점에 오른다. 다음 등반자는 조규배씨. 힘 쓰는 소리가 울리고 크랙에서의 악전고투가 이어지지만 줄 당겨 달란 말 없이 악착같이 오른다. 중간쯤 오른 지점의 크랙에서 힘겨워하는 모습이 역력하지만 결국 다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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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호종씨는 심한 감기몸살을 앓아 지난 열흘 동안 집 밖에 나오지 못했다.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느리지만 조용하고 묵묵한 등반을 해냈다. 세 친구가 40여 년 만에 선인봉의 벽에 매달린 것이다. 사진도 찍고 경치도 충분히 즐기고 하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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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이야 주말이면 바위 하는 사람들로 붐비지만 당시에는 등반하는 이들이 적어 바위에 가면 다들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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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문리대산악회는 선인A·B와 측면길, 연기봉 등 비교적 쉬운 코스를 많이 했다고 한다. 어쨌든 가장 많이 왔던 곳이 이곳 선인봉이었기에 이들의 감회가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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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는 로프가 엄청 귀해서 몸은 상해도 로프는 상하면 안 된다고 얘기할 정도였단다. 오씨는 “옛날에 장비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이런 델 갔을까 싶다”며 오늘 등반을 해보니 그런 생각이 더 든다고 했다. 한편으론 과거의 느낌이 되살아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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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반한 지 40년쯤 됐는데 오르다 보니 바위 할 때의 느낌이 되살아났어요. 그때 바위를 타면 거의 탈진 상태였는데 그 상태가 아주 기분이 좋아요. 일종의 성취감과 환희 같은 거죠. 오늘은 오랜만이라 역시 어렵긴 어렵네요.” 노씨는 “후배들이 든든하게 확보를 해줘서 편하게 등반했다”며 구조대원들에게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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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등반하니 기분이 업된다”며 “크랙이라 힘이 없어 혼났지만 다음번엔 슬랩 등반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조규배씨는 오늘 등반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겠다”며 감격스러움을 표했다. 더불어 “머리로는 어떻게 등반을 해야겠다는 게 그려지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아쉬울 따름”이라며 “장비가 워낙 좋아져서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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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씨는 한 술 더 떠서 “앞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등반하자”며 제안했다. 마치 대학산악부 시절로 되돌아간 것처럼 들뜬 분위기다.
- ▲ 1 대한산악연맹 부회장인 노익상씨. 분위기 메이커이자 괴짜로 통한다. 2 40여 년 만에 선인봉에 매달린 세 친구들. 3 오호종씨. 차분한 성격과 포용력으로 친구들을 아우르는 역할을 한다. 4 서울시연맹 조규배 회장. 그의 대학 시절 별명은 ‘뱀장수’와 ‘불나비’였다.
“배추 한 덩이와 된장에 쌀만 있으면 산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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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강을 마친 이들이 장비를 정리하며 옛날 등반 얘기를 나눈다. 조씨는 바로 옆의 박쥐길을 가리키며 “박쥐길을 자주 등반했는데 바위 속에 박쥐가 많이 살아서 등반할 때면 박쥐 똥 냄새가 진동했다”고 한다. 노씨는 대간 종주를 할 때의 힘들었던 추억을 얘기한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1년 365일 중 120일을 산행했습니다. 매일 데모해서 휴교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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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백두대간 종주를 소백에서 태백산까지, 태백에서 대관령까지, 다시 진부령까지 세 번에 나눠 종주했죠. 수십 일을 산중에서 살았으니 거의 산거지였어요.” 그러자 조씨가 “요즘처럼 공부하라고 강요했으면 졸업 못했을거다”라며 말을 보탠다. 끈끈한 대학산악부 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데에는 산악부실도 한몫했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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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서울대 문리대학 산악회는 동숭동캠퍼스 안에 경성제대 시절의 단독 판잣집(약 100평, 높이가 5~6m)을 수리해 산악회회관(백계산장)으로 썼다고 한다. 그래서 지방에서 유학 온 부원들은 아예 산악회실에서 먹고 자고 했으며 술도 마셨다. 매일 데모가 이어져 휴교령이 떨어질 때가 많았고 이를 기회 삼아 물 만난 고기처럼 군용 A텐트를 들고 산으로 쏘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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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추 한 덩이와 된장, 쌀만 있으면 야영하러 갔단다. 비록 초라했지만 당시에는 산에서 불을 피우는 게 가능했기에 “참 재미있었다”는 것이 공통된 기억이다. 장비를 정리해 도봉산장에 내려와 커피를 마시는 60대의 산친구들. 서로에 대한 추억담이 이어졌다. 노익상씨는 학창 시절의 조규배씨에 대해 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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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장 뒤 철조망 담장 바로 너머에 구멍가게가 있어서 막걸리, 소주, 과자를 사다가 먹었어요. 밤 늦은 시간 술기운이 돌면, 조규배는 나대(정글을 헤치기 위한 일본식 넓적한 큰 칼)를 들고, 산장의 넓은 판자 책상 위에 올라갔어요. 그러곤 ‘애들은 가라, 얼굴에 핏기가 없는 사람에게는 흰 백사, 밤에 소변 자주 보는 사람에게는 무지갯빛 칠보사, 마누라 옆에 못 가는 남자들에게는 독사’하며 어디에선가 들은 것 같은 뱀장수 타령을 그럴 듯이 늘어놓으며 친구들을 웃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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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곤 반주도 없이 ‘얼마나아 사무치는 그리이~ 움~ 이냐~ 냐냐냐냐~’하며 불나비 노래를 구성지게 불러젖혔어요. 그래서 규배 별명이 뱀장수하고 불나비였어요.” 오호종씨와 조규배씨는 1970년에 ROTC 장교로 임관해 조규배씨는 일선 소대장으로, 오호종씨는 원통의 통신부대 소대장으로 근무를 했다고 한다. 이들이 군 생활을 하던 1971년 마침 산악회에서 설악산 북주릉 동계 초등반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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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 오씨는 원통에 있는 자신이 근무하던 통신부대에서 당시 길이 없었던 미시령까지 소대원들을 데리고 통신선과 전기선을 끌고 왔다고 한다.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과 영하 20도의 혹한을 뚫고 말이다. 덕분에 산악회원들은 편하게 야영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노익상씨가 “통신부대 중위 끗발로는 불가능했을 텐데, 영창 갈 각오하고 왔냐? 호종아, 너 그때 어떻게 끌고 왔냐?”라고 물으면 그는 지금도 배시시 웃을 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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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이들은 킬리만자로로 등반을 갔다. 4일을 걸어 마웬지봉 아래 연못에 도착해 화창한 날씨 속에 야영했다. 노익상씨는 홀딱 벗더니 모자를 쓰고 아랫도리를 수건으로 가리고는 그대로 누웠다. 한 시간쯤 지나자 파랗던 하늘에 구름이 몰려와 우박이 쏟아지고 굵은 빗줄기가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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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택에 텐트 안으로 대피해야 했고 조규배씨는 노익상씨에게 말린 북어를 주며 “당장 나가서 고사 지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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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때문에 날씨가 이런 거다”라고 하자 노씨는 우박이 쏟아지는 연못가에 북어와 소주 한 잔을 놓고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산에서 발가벗지 않을게요”라고 읊조렸다고 한다. 그의 이런 옷벗기 기행은 꾸준히 이어져 무즈타그아타(7,400m)에 갔을 때에도 1캠프 설벽 아래 눈밭에서 팬티만 입고 일광욕을 하는 등 서양 사람들과 옷벗기 경쟁을 했다고 한다.
자신이 다치는 것 아랑곳않고 추락을 잡아준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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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꽃잎이 떨어지는 도봉산장에서 대학산악부 시절을 추억하는 산친구들.
- 노익상씨는 서울대 문리대생이 아니었으니 서울대 문리대산악회 입회부터가 기행이었다. 그는 “산악회 선배들의 간섭이 있었지만 66학번 동기들이 수가 많고 응집력도 강해서 암묵적으로 동의해 편안하게 같이 산에 다녔다”고 한다. 당시엔 산악부 인기가 높아 신입생이 20명 정도 들어왔으며 1년 후엔 10명 정도가 남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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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리대산악회는 산행은 힘들게 했지만 산악회 내 분위기가 시대와 어울리지 않게 자유스러웠다.
“문화가 자유스러웠어요. 선배가 강압하거나 그런 게 없고 ‘빠따’ 같은 것도 거의 없고 야영 가면 어떨 때는 선배들이 후배들 깨워서 차를 타주고 그랬어요. 굉장히 개방적이고 개인을 존중하고 진보적이었죠.” 이들은 그때를 산악회의 전성기라고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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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서울대가 관악산 자락으로 이전하면서 3개 단과대가 통폐합됐으며 백계산장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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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들 산악부 동기들은 졸업 후에도 계속 산친구의 정을 이어와 지금에 이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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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산친구의 정에는 애주가라는 공통점도 한몫했다. 산친구가 술친구고 술친구가 산친구이니 도시에서고, 산에서고 심심하면 연락해서 만날 수 있었다. 보통 나이가 60이 넘으면 건강을 위해 산에 간다는 이들이 많지만, 이들은 아직 “산에 가기 위해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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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익상씨는 이렇듯 오래도록 정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산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산에서 육체적인 고통을 같이 겪으며 쌓인 정 같아요. 바위에서 추락할 때 자기 다치는 건 생각하지 않고 몸으로 막으며 확보하고, 여름에 며칠씩 비 맞으며 종주할 때 뽀송뽀송한 게 정말 귀하고 간절한데, 비닐에 싸둔 자기 속옷을 주는……. 그런 추억들이 쌓이면서 이런 친밀감이 생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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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산친구는 무슨 얘기든 할 수 있어요.”
특히 이들 셋이 가까울 수 있었던 것은 서로 성격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 명이 모이면 주로 주도적인 역할은 조규배씨가 하고 분위기 메이커 역할은 노씨가 하고 오씨는 편안하게 아우르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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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호종씨는 이들처럼 산악계에 몸담진 않았으나 조용히 뒤에서 다 받아주는 성품이라 친구들 사이에 신의가 좋은 사람으로 통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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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든 일이 있을 때 누구든 오씨에게 전화를 하면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 길로 나와 고민을 들어준다고 한다. 도봉산에서 내려와 식사를 하면서도 이들의 40여 년 전 대학산학부 시절 얘기는 끝이 없었다. 이들이 45년간 친구의 정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대학산악부 시절의 같은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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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의 고통을 같이 겪으며 쌓인 게 친해진 비결이죠. 육체적으로는 고통스런 추억이지만 마음으로는 즐거운 추억이니까. 잊을 수가 없어요.”
- 글 신준범 기자 / 사진 이구희 기자 / 월간 산 6월호에서 - |